서울의 봄
12.12: The Day
2023.12.27 롯데시네마 도곡
사실 영화 개봉 때는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뭐하러 돈 주고 스트레스 받으러 가냐 싶어서. 한창 집에 일이 생겨 바쁘기도 했었고.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고 짬이 났을 때 보니 한 달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극장에 걸려 있어서 깜짝 놀랐다. 게다가 관객수도 심상치 않다. 마침 12월 마지막 주 문화의 날이 낼모레라 보러 가기로 마음 먹고 예매했다. 이른 저녁 시간이었는데도 상영관 안에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내돈내산 스트레스. 상영시간이 2시간 20분 정도던데 체감상 딱 2시간 정도로 짧게 여겨졌고 그 두 시간 내내 저혈압 치료 잘 하고 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급조절이 없고 계속 강강강강 리듬으로 달려가길래 따라가기 바빴다. 비슷한 느낌의 영화가 딱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매드맥스였다. 매드맥스가 강렬한 액션으로 두 시간 내내 아드레날린 뿜어내게 만들었다면 서울의 봄은 물 없이 고구마 먹은 답답함으로 목 메여 죽는 긴장감과 공포에 시달리게 만든다는게 차이점이겠다. 결말에 이르러 드디어 끝났나 한숨이 나올 즈음 하나회 단체 사진 엔딩 씬으로 다시 한 번 막타 날려 확인사살하고 끝난다.😩
등장인물들도 많고 동시에 여러 장소에서 진행되는 사건들이 교차로 보여져서 복잡한 것처럼 보이는데 영화 자체는 매우 친절하다. 친절한 자막과 교육자료 같은 CG를 통해 지금 무슨 일이 왜, 어떻게 진행이 되고 있구나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사건을 잘 모르더라도 영화를 한 번 보는 것으로 대략의 흐름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자세한 내막이 궁금하면 그 이후에 실제 자료를 찾아보면 되는 것이고.
반란 자체가 넌센스지만 보다보면 군대가 진짜 저런가 싶어서 헛웃음이 나오는 부분이 많다. 명령 체계랄 게 없고 친분에 따라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르는게 지휘관이고 군대 조직인가... 이런 말도 안되는 군 문화가 하나회의 핵심이자 정체성이긴 했다. 반대쪽인 진압군도 한숨 나오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요즘은 저런 막장이 아닐거라 믿어본다.
그러고보면 학교에서 현대사를 배울 때 역사책에 12.12 사태 ('사태'였는지 '쿠데타'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에 대한 언급이 있긴 했지만 간략하게 신군부의 권력 장악 이런 정도만 서술되고 자세하게 내용을 들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오로지 선생님의 재량에 따라 얼마나 정보가 전달이 될지 판가름이 나는 시대였던 것 같다. 이것 뿐 아니라 대부분의 현대사의 중요한 날들이 연월일 날짜로만 기억되고 그 날 있었던 사건의 진실이나 의미 같은건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느낌... 어른이 되어서라도 찾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황정민의 연기는 이때까지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그냥 믿고 갔는데 역시나... 촬영 끝나고 구마의식은 제대로 하셨는지 궁금하다. 정우성은 내가 딱히 그의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았기에 잘 몰랐는데 황정민의 반대 포지션으로 정말 훌륭하게 잘 연기했다. 그래도 장포스의 포스가 워낙 강해서 살짝 심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정확히 바른 생활, FM 군인 느낌의 정우성의 외모에는 조용하고 차갑지만 매서운 인물로 연기한 것이 훨씬 잘 어울린다. 이준혁이나 정해인은 분량은 짧지만 아저씨들 틈에서 아주 많이 눈에 띄기도 했고 임팩트 있는 인물 연기를 잘 해냈다.
옆자리에 연세 있으신 부부 분이 계셨는데 이순자 나올때 웃음 터지셨음. 나도 얼굴이 가물가물한데 젊은이들은 더욱 잘 모르겠지. 이 부분 말고도 어르신들만 알아볼 수 있는 포인트가 있을 것 같다.
요약하자면 무겁고 결코 즐겁지 않은 내용의 영화인데 몰입해서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도록 잘 만들어진 영화. 배우들 연기는 훌륭했고, 특정 장면들의 미장센도 좋았다. 요즘 영화관에 가는 관객수가 줄어서 힘들다고 하지만 잘 만들어진 영화는 그 와중에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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