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일메리 원작을 읽어보려고 한 것이 작년 말. 그러나 타이밍을 놓치고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는 거의 대출이 불가능한 상태. 예약이 밀려 대기를 걸어놓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두 달 전에 5번째로 예약을 걸어놓고 잊어버리고 있다가 연락이 와서 드디어 책을 가져왔다.

아무리 인기 많은 책이라지만 이렇게 너덜너덜해질 일인지. 표지야 그렇다 치지만 안쪽에까지 오염이 되어 있는 거 보면 사람들 참 자기 책 아니라고 막 다루는구나 싶다.
해외소설이니만큼 번역체 걱정을 했는데 원래 작가 문체가 그런건지 후루룩 잘 읽히는 심플한 문체였다. 작가가 웹에 연재를 시작으로 글을 썼다고 하니 그 영향이 있는 건지. 웹소설만큼이나 단순 명료한 문장이 많아서 그 점은 마음에 든다.
그럼에도 익숙해지지 않는 미국식 조크가 담긴 묘사, 클리셰 그 자체인 조연들 (특히 과학자, 엔지니어들은 뭔가 공식적으로 정해진 타입 별로 하나씩 등장하는 것 같다), 미국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어색한 느낌의 대사 정도만 살짝 거슬린다. 그런 점들이 바로 어찌 보면 우울한 이 이야기의 유쾌함 지수를 올려주고 있긴 하지만.
영화는 복잡한 과학 얘기를 덜어내고 낭만 함량을 올려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영상화가 진짜 잘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헤일메리호가 출발하기 전 지구에서 발생한 어처구니 없는 사고는 영화를 볼 때도 이해가 안 갔는데 책으로 읽어도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 물론 실제 역사에도 비슷한 류의 어이없는 실수 탓에 발생한 엄청난 사고가 있었지만. 전 세계가 힘을 모아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쏘아 올리는 거짓말처럼 완벽한 인류 화합의 시대에 이게 무슨 말인지. 내게는 뭔가 밸런스가 안 맞는 느낌이었다.
에리디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연료도 넉넉하고 지구와 달리 종말까지의 기한도 넉넉한 편이고. 그런데도 우주선을 뚝딱 만들자마자 부리나케 출발한 탓에 위대한 공학적 산물을 잃어버린 것도 그렇고. 그래서 이 모든 이야기가 이어진 것이겠지만... 역시 완벽하게 굴러가는 원대한 계획은 없다는 것일까.
어쨌든 긴 고독을 견뎌야 하는 우주여행에서 여행자들의 정신 건강 상태는 상당히 중요하다. 그레이스나 로키나 둘 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그리고 상대의 선함을 믿고 서로 돕고 의지하는 마음이 그 위험한 임무를 단 둘 뿐으로 수행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였지만 결말은 여전히 뻔한데 감동적이다. 지구로 돌아가 스트라트에게 죽빵을 날린다 해도 그게 보답이나 될까 싶다. 아무튼 우정 엔딩을 위해서 그레이스가 지구에서 외톨이라 다행이었다. 인터스텔라의 쿠퍼였다면 '미안해, 로키. 그래도 나는 지구로 가야 해.' 이러고 고향으로 복귀했을 테니까.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빛에는 운동량이 있어요." 내가 말했다. "힘을 낸단 말입니다. 우주에 나가서 손전등을 켜면 그것 때문에 아주 아주 작은 추진력을 얻게 돼요."
이 항성계에 나 말고도 다른 우주선이 있다. 번쩍이는 빛은 그 엔진에서 나온 것이었다. 저 우주선도 아스트로파지를 동력으로 사용한다. 헤일메리와 똑같다. 하지만 그 디자인은, 그 형태는 내가 여태껏 본 어떤 우주선과도 다르다. 선체 전체가 거대하고 납작한 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압력 용기를 만드는 최악의 방법이다. 제정신인 사람이 우주선을 저런 모양으로 만들 리는 없다.
제정신인 지구인이라면 말이다.
나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몇 차례 눈을 깜빡인다. 침을 꿀꺽 삼킨다.
저건... 저건 외계의 우주선이다. 외계인이, 우주선을 만들 정도의 지능이 있는 외계인들이 만든.
인류는 우주에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방금 우리의 이웃을 만났다.
"이런 씨발!"
"아스트로파지 표본은 추출했어?"
"아니, 내 우주선에 표본 추출용 장치가 있었음. 그러나 망가짐."
"못 고쳤어?"
"장치 오작동 아님. 부러짐. 여행 중에 우주선에서 떨어짐. 없어짐."
"아! 저런, 어쩌다 부러졌어?"
그는 등딱지를 움찔거린다. "모름. 많은 것 부러짐. 우리 종족 매우 서둘러 우주선 만듦. 모든 게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할 시간 없음."
마감 시간이 정해진 데서 오는 품질 문제라. 우주 전체의 문제로군.
뭐라고? 내가 로키의 엔진에서 나오는 빛이 페트로바스코프의 감지 범위를 벗어나는 순간을 알아내기 위해 상대성이론을 가지고 특정 시점에서의 우리 상대 속도를 계산하는 엄청난 일을 한 다음 로런츠변환까지 했다고? 그냥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내 친구를 얼마나 더 오래 볼 수 있을지 알고 싶어서? 그거 좀 딱한 것 아닌가?
그렇다.
뭐, 나의 애절한 매일 일과가 끝났다. 나는 페트로바스코프를 끄고 다시 스핀 드라이브를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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