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고독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조구호 옮김, 민음사
사촌동생에게 빌린 지 꽤 되었는데 시작을 못 하고 있다가 한참 만에 읽게 되었다. 사실 한번 펼쳐봤다가 가계도와 등장인물들 이름에 기가 죽어서 바로 책장 덮은 적 있다.
여유가 생겨 각 잡고 읽어보자 마음먹고 시작을 했는데 생각 외로 시트콤 같은 면이 있어서 쭉 읽어나갈 수 있었다. 배경은 드라마 나르코스로 친숙해진 콜롬비아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술라 이구아란 부부로부터 시작된 부엔디아 가문의 연대기 같은 이야기다. 가족 외에 등장인물도 많고 이름도 길고 발음이 익숙하지 않아 외우기 어렵다. 가족들의 이름은 금방 익숙해지나 비슷하거나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이 몇 대에 걸쳐 나오기 때문에 더 헷갈린다. 심지어 이 가족들은 어찌나 오래 사는지 고조부모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에겐 미안하지만 읽다가 한 사람씩 죽어서 퇴장할 때 조금 기뻤다.
종이책 2권짜리 긴 소설을 읽고 나니 한 가문의 흥망성쇠를 옆에서 지켜본 것 같았다. 비단 가족 뿐 아니라 부엔디아 가문이 일구고 정착한 마꼰도라는 마을, 그리고 마을 단위를 넘어 한 나라의 시대 별 정치, 종교, 경제의 변화 상을 모두 들여다 본 느낌이다.
읽다 보면 이게 비유인지 은유인지 모를 환상에 가까운 묘사들이 꽤 나오는데 의심하지 말고 그냥 보면 된다. 책의 해설에서는 이를 '경이로운 사실' 혹은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
사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가 초현실주의적 수법으로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좁게는 리얼리즘의 한 유형, 넓게는 세계 인식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제목의 고독이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의 고독을 뜻한다고 하는데, 사실 잘 이해가 안 갔다. 이 정도면 정 많고 괜찮은 가족 아닌가 싶어서 ㅋㅋ 비록 SIMS 막장 플레이에서나 나올 거 같은 가계도이지만, 집에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도 모두 잘 품어서 키워준 거 같은데. 이 집 3대 아이들은 모두 어머니가 누군지 알지만 쉬쉬하는 사생아들이다. 우르술라부터 아마란따, 산따 소피아 같은 여자들이 이런 아이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품고 키워낸거 자체가 그리 고독하진 않아 보이는데... 물론 유달리 고독 속성을 붙일만한 남자들이 몇 있긴 하다. 우르술라는 여장부 같으셨던 우리 외할머니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름이 같은 아이들은 모두 비슷한 운명을 반복해서 살아간다. 중간에 쌍둥이 대에서 살짝 변주가 있지만 크게 보면 그들도 동일한 운명을 따라갔다. 전체적인 그림으로 보면 하나의 점에서 시작해 점점 커지는 나선의 모양이 연상된다. 인물들과 함께 이들 가족이 사는 '집' 자체에 대한 묘사도 세세하게 그려지고 있는데 대식구들과 외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로 흥할 때 화려함을 자랑하는 집과 식구가 죽거나 집을 떠났기에 아무도 돌보지 않아 쓰러지기 직전의 집의 대비도 인상적이었다. 그놈의 개미들 묘사는 오싹할 정도.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이 집안 내부의 문제와는 별개로 마을, 국가 같은 외부의 변화의 흐름에 휩쓸려 그 운명이 정해지는 것이 인상적인데 결국 결말에서 이 모든 것이 다 예정되어 있었다고 밝혀진다.
문장은 길고 묘사도 많아서 사실 읽는데 힘들긴 했다. 섬세한 묘사가 많아서 잘 따라가기만 하면 눈 앞에 그려지듯 보이긴 하는데 묘사 자체가 너무도 많다 보니 한 문장이 머릿속에 입력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긴 문장을 짧게 요약하려면 주어, 동사, 목적어, 보어 등을 찾기 위해 몇 개나 되는 줄을 훑어봐야 한다. 이것은 나라 별 언어의 어순이 다르기 때문일까? 제일 긴 문장이 나왔을 때 확인해 보니 페르난다가 남편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에게 신세 한탄하는 내용이 담긴 문장으로 3페이지가 조금 넘는다. 읽다 지쳐서 진짜 마침표가 어디 있는지 확인해 봤다.읽기는 힘들었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묘사도 많다. 마꼰도에 철도 길이 놓이고 처음으로 기차가 들어오는 순간을 그리는 장면은 마치 그림처럼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다.
영상화가 되었으면 대하 드라마가 되었을 거 같은데 아쉽게도 아직 영상화된 작품은 없다. 넷플릭스에서 제작 예정이라고 하니 나오게 되면 꼭 봐야겠다. 이 복잡하고도 난해한 소설을 어떻게 드라마화할지 정말 궁금하다.
그들은 신부가 없어도 영혼에 관한 협상을 하느님과 직접 하면서 여러 해 동안 잘 살아왔으며, 원죄로 인한 악은 떨구어 버렸다고 대답했다.
-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직접 협의한 (침착맨이 생각나는) 마꼰도 주민들 😅
아마란따는, 어머니가 부엌에서 수프 냄비를 흔들고 있다가 누가 자기 말을 듣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불쑥, 마꼰도를 찾아왔던 첫번째 집시들에게서 가족들이 자기에게 사준 옥수수 빻는 기계가 호세 아르까디오가 예순다섯번째 세계 일주를 하기 전에 사라져버렸는데, 여태 삘라르 떼르네라의 집에 있을 거라고 하는 말을 들었던 어느 날, 페르난다와 비슷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 이해하기 힘든 문장의 예시 😂 아직도 모르겠다.
끝없이 계속되는 요란법석한 파티에서 수많은 소와 돼지와 닭들이 도살당했기 떄문에, 엄청난 피로 마당 흙이 검은색으로 변하고, 질퍽거렸다. 그곳은 뼈다귀와 내장들의 영원한 안식처, 찌꺼기들의 쓰레기장이 되었고, 가이나소들이 손님들에게 달려들어 눈알을 쪼아대지 못하게 하려고 쉴새없이 다이너마이트 통을 불사르고 있어야만 했다.
- 전체적으로는 이런 다크한 분위기가 아님에도 가끔 소름 돋게 만드는 장면 묘사가 있다. 비슷한 것으로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가 기차역 앞에서 살해당한 군중들의 시체와 함께 기차에 실려가다 탈출하는 장면, 호세 아르까디오가 자살하고 그의 몸으로부터 흘러나온 피가 마을을 건너 흘러와 어머니 우르술라에게 닿는 장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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